- 신빈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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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 김씨는 첨지중추원사 휘 원의 따님으로 본관은 청주요 어머니는 고씨이니 본관이 삭녕이다.영락 四년 병술 七월 十二일에 빈을 나셨으니 빈은 나시면서부터 아름다운 덕이 있고 행동거지가 보통사람과 달라서 중추(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나이 十三에 궁중에 뽑혀 들어가 세종 장헌대왕을 섬김에 항상 조심성 있고 삼가 두려워하며 대궐의 안 일을 도우니 이로 말미암아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였다. 선덕 三년에 소용의 작위를 내리고 七년에 숙의로 승진하였으며 八년에 소의로 가자되고 정통 四년에 귀인으로 명하였으며 十三년에 신빈에 책봉되었고 세종 임금이 돌아가시니 머리를 깎고 구족계(불교에서 갖추어야 할 계율)를 받아 자수궁에 별거하셨으며 천순 八년 갑신 가을에 병으로 누우시니 임금이 친히 와보시고 의원과 약을 갖추어 보냈으나 九월 초四일 정실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五十九세였다.
임금이 심히 슬퍼하사 조회를 철폐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초상을 도우라 하고 은의로 부조를 더 갖추어 주었으며 그해 十二월 초六일 남양부에 예장하니 마을은 은성이요 언덕은 인좌이다.
빈이六남을 나셨으니 맏은 증이니 계양군에 봉하고 다음은 공이니 의창군이며 다음은 침이니 밀성군이요 다음은 연이니 익현군이고 다음은 당이니 영해군이며 다음은 거이니 담양군이요 계양군과 익현군은 흥운에 의지하여 좌익일등공신에 책훈되었다.
계양군이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확의 따님을 취하여 세 아들을 낳으니 맏은 풍이니 영원군이요 다음은 융이니 강양군이며 다음은 부림군이니 식이요 삼남은 어리다. 의창군이 관찰출척사 김수의 따님을 취하여 一남을 낳으니 영산군 호이다. 밀성군이 판한성부사 민승서의 따님을 취하여 四남을 낳으니 맏은계이니 운산군이요 다음은 옥손이며 다음은 만손이고 다음은 춘종이니 다 어리다.
익현군이 첨지중추원사 조철산의 따님을 취하여 一남을 낳으니 괴산군 지이다. 영해군이 의정부 좌찬성 신윤동의 따님을 취하였고 담양군은 장가들기 전에 돌아갔다. 아아 정숙한 덕으로 내전의 빈으로 발탁되어 능히 임금의 총애를 받고 아드님을 많이 두시어 경사를 누리니 감히 경건하지 않을까 위하여 명(銘)하노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우사 세종대왕이 나셨으니 대왕은 건장하시고 왕후는 자손을 많이 두셨네.아름답다 김씨가 나이
十二세에 대궐에 들어가시어 경계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임금의 총애를 받으시니 그 은혜가 날로 새롭네. 이미 귀인 되고 또 빈으로 책봉되셨네.
왕이 신선 되어 승천하시니 임은 돌아오지 않고 임금님 승하하시니 불가의 계율따라 삭발하셨다네. 여섯 아드님 봉군되니 위아래 형제일세. 왕손이 더욱 번성하니 경사가 선원에 넘치네. 아름다운 남양은 산이 높고 바다가 넓네.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니 임금님의 은총 빛나네. 영원히 산소에는 이 글이 빛나리라.
정헌대부 공조판서 세자우빈객 김수온이 글을 짓고 위용장군 행 충무위 호군 안혜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서하였으며 성화 원년 을유 五월 二十일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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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김씨 적청주 愼嬪金氏 籍淸州
첨지중추원사원녀외조고 본삭녕 태종병술칠월십이일생십이세선입후 僉知中樞院事元女外祖高 本朔寧 太宗丙戌七月十二日生十二歲選入後
궁 세종무신소용임자숙의기미귀인정묘책빈 세조갑신구월사일졸위아 宮 世宗戊申昭容壬子淑儀己未貴人丁卯策嬪 世祖甲申九月四日卒位亞
중곤문호제언생육남 묘남양은성리인좌원속칭밀릉묘재영천정가운판서김수온찬 中귤門戶齊焉生六男 墓南陽銀城里寅坐原俗稱密陵廟在永川正家云判書金守溫撰
묘비호군안혜서전안안동김씨보오이밀성군이하위순빈출이실순빈무육비시 墓碑護軍安惠書篆按安東金氏譜誤以密城君以下爲順嬪出而實順嬪无育非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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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 김씨 본관은 청주
첨지중추원사 원의 따님이며 외조는 고씨이니 본이 삭녕이다. 태종 병술 七월 十二일에 나셨고 十二세에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 세종 무신년에 소용이 되시고 임자년에 숙의가 되셨으며 기미년에 귀인이 되셨고 정묘년에 빈에 책봉되셨다. 세조 갑신 九월 四일에 돌아가시니 위상은 중전에 버금갔고 문호를 정제하여 다스렸고 六남을 낳았다. 묘소는 남양 은성리 인좌원이다. 속칭은 밀릉묘가 영천정가에 있다고 한다. 판서 김수온이 묘비문을 짓고 호군 안혜가 글씨를 쓰고 전서도 썼다.
안동김씨 족보를 살펴보면 밀성군 이하는 순빈 소생이라고 그릇 표시되었으나 실은 순빈이 무육임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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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 김씨는 첨지중추원사 휘 원의 따님으로 본관은 청주요 어머니는 고씨이니 본관이 삭녕이다.영락 四년 병술 七월 十二일에 빈을 나셨으니 빈은 나시면서부터 아름다운 덕이 있고 행동거지가 보통사람과 달라서 중추(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나이 十三에 궁중에 뽑혀 들어가 세종 장헌대왕을 섬김에 항상 조심성 있고 삼가 두려워하며 대궐의 안 일을 도우니 이로 말미암아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였다. 선덕 三년에 소용의 작위를 내리고 七년에 숙의로 승진하였으며 八년에 소의로 가자되고 정통 四년에 귀인으로 명하였으며 十三년에 신빈에 책봉되었고 세종 임금이 돌아가시니 머리를 깎고 구족계(불교에서 갖추어야 할 계율)를 받아 자수궁에 별거하셨으며 천순 八년 갑신 가을에 병으로 누우시니 임금이 친히 와보시고 의원과 약을 갖추어 보냈으나 九월 초四일 정실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五十九세였다.
임금이 심히 슬퍼하사 조회를 철폐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초상을 도우라 하고 은의로 부조를 더 갖추어 주었으며 그해 十二월 초六일 남양부에 예장하니 마을은 은성이요 언덕은 인좌이다.
빈이六남을 나셨으니 맏은 증이니 계양군에 봉하고 다음은 공이니 의창군이며 다음은 침이니 밀성군이요 다음은 연이니 익현군이고 다음은 당이니 영해군이며 다음은 거이니 담양군이요 계양군과 익현군은 흥운에 의지하여 좌익일등공신에 책훈되었다.
계양군이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확의 따님을 취하여 세 아들을 낳으니 맏은 풍이니 영원군이요 다음은 융이니 강양군이며 다음은 부림군이니 식이요 삼남은 어리다. 의창군이 관찰출척사 김수의 따님을 취하여 一남을 낳으니 영산군 호이다. 밀성군이 판한성부사 민승서의 따님을 취하여 四남을 낳으니 맏은계이니 운산군이요 다음은 옥손이며 다음은 만손이고 다음은 춘종이니 다 어리다.
익현군이 첨지중추원사 조철산의 따님을 취하여 一남을 낳으니 괴산군 지이다. 영해군이 의정부 좌찬성 신윤동의 따님을 취하였고 담양군은 장가들기 전에 돌아갔다. 아아 정숙한 덕으로 내전의 빈으로 발탁되어 능히 임금의 총애를 받고 아드님을 많이 두시어 경사를 누리니 감히 경건하지 않을까 위하여 명(銘)하노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우사 세종대왕이 나셨으니 대왕은 건장하시고 왕후는 자손을 많이 두셨네.아름답다 김씨가 나이
十二세에 대궐에 들어가시어 경계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임금의 총애를 받으시니 그 은혜가 날로 새롭네. 이미 귀인 되고 또 빈으로 책봉되셨네.
왕이 신선 되어 승천하시니 임은 돌아오지 않고 임금님 승하하시니 불가의 계율따라 삭발하셨다네. 여섯 아드님 봉군되니 위아래 형제일세. 왕손이 더욱 번성하니 경사가 선원에 넘치네. 아름다운 남양은 산이 높고 바다가 넓네.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니 임금님의 은총 빛나네. 영원히 산소에는 이 글이 빛나리라.
정헌대부 공조판서 세자우빈객 김수온이 글을 짓고 위용장군 행 충무위 호군 안혜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서하였으며 성화 원년 을유 五월 二十일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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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김씨 적청주 愼嬪金氏 籍淸州
첨지중추원사원녀외조고 본삭녕 태종병술칠월십이일생십이세선입후 僉知中樞院事元女外祖高 本朔寧 太宗丙戌七月十二日生十二歲選入後
궁 세종무신소용임자숙의기미귀인정묘책빈 세조갑신구월사일졸위아 宮 世宗戊申昭容壬子淑儀己未貴人丁卯策嬪 世祖甲申九月四日卒位亞
중곤문호제언생육남 묘남양은성리인좌원속칭밀릉묘재영천정가운판서김수온찬 中귤門戶齊焉生六男 墓南陽銀城里寅坐原俗稱密陵廟在永川正家云判書金守溫撰
묘비호군안혜서전안안동김씨보오이밀성군이하위순빈출이실순빈무육비시 墓碑護軍安惠書篆按安東金氏譜誤以密城君以下爲順嬪出而實順嬪无育非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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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 김씨 본관은 청주
첨지중추원사 원의 따님이며 외조는 고씨이니 본이 삭녕이다. 태종 병술 七월 十二일에 나셨고 十二세에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 세종 무신년에 소용이 되시고 임자년에 숙의가 되셨으며 기미년에 귀인이 되셨고 정묘년에 빈에 책봉되셨다. 세조 갑신 九월 四일에 돌아가시니 위상은 중전에 버금갔고 문호를 정제하여 다스렸고 六남을 낳았다. 묘소는 남양 은성리 인좌원이다. 속칭은 밀릉묘가 영천정가에 있다고 한다. 판서 김수온이 묘비문을 짓고 호군 안혜가 글씨를 쓰고 전서도 썼다.
안동김씨 족보를 살펴보면 밀성군 이하는 순빈 소생이라고 그릇 표시되었으나 실은 순빈이 무육임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